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셸 푸코 (문단 편집) === 대학 생활 === 합격했을 때의 기쁨과는 반대로, 고등사범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코는 고독했고 날카로웠다. 그는 아주 격렬하게 남들을 조롱하곤 했는데, 이는 학교 내에서 곧 유명해졌다. 누구하고나 논쟁을 벌였고, 불같이 화를 냈으며, 온 사방에 공격성을 들이댔는데, 이 때문에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마음이 불안정했던 푸코는 이시기에 몇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하루는 교실 바닥에 누워 면도칼로 가슴을 그으려는 순간 어떤 선생이 이를 보고 제지한 적도 있었다. 아마 이 시기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확인하고는 심한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버지와 함께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도 있었다. 당시는 정말로 동성애자가 살기에 쉽지 않은 시기였다. 푸코는 이러한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 한편으로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고전주의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임마누엘 칸트|칸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 등등 모든 것을 읽었다. 1949년, 23살에는 헤겔을 가지고 석사논문을 썼다. 논문 제목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의 역사적 초월성 구성』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도 읽었음이 분명하다. 당시에는 누구나 읽었으니까. [[에드문트 후설|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하이데거]]도 공부했다. 특히 하이데거 원전을 읽기 위해서 독일어 공부도 병행했다. 물론 고등사범학교에서 진행하는 [[모리스 메를로퐁티|메를로퐁티]]와 [[루이 알튀세르|알튀세르]]의 강의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들었다. 알튀세르는 수업을 자주 빠뜨리긴 했지만 학생들과 개인적인 상담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푸코도 알튀세르를 믿고 따랐으며 그의 조교수로도 활동했다. 푸코가 공산당에 입당한 것도 상당 부분 알튀세르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런 탓인지 푸코는 공산당 내부에서 열렬한 투사는 아니었고 대략 1년 뒤엔 탈당한다.[* 적어도 1953년에는 탈당한 것이 확실하다. 탈당의 이유는 복합적인데, 아무래도 푸코는 동성애를 부르주아의 악덕, 퇴폐의 징후로 보는 당에서 마음의 불편을 느꼈을 것이다. 알튀세르도 푸코가 왜 공산당을 떠났냐는 질문에 "동성애 때문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그린비출판사, 2012, p.101 참조)][* 알튀세르는 푸코를 좋게 봐주었는지 푸코와 결별한 이후에도 여러 저작에서 푸코를 비교적 후하게 평가했다. 반면 랑시에르나 바디우 등 자신과 결별한 다른 제자와는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혹평하기도 했다.] 1951년 교수자격시험을 합격한 후, 고등사범학교의 심리학 조교로 강의를 시작했다. 생트 안 병원에서 연수생 자격으로 임상실습을 실제로 보여주면서, 학생들을 꽤나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1년 뒤엔 파리 심리학연구원에서 정신병리학 석사학위 자격증을 취득했고, 릴 대학 심리학 조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이때 [[프리드리히 니체]]와 조르주 바타유에 빠져들었다. 심리학적 연구는 더욱 진행되어 이를 바탕으로 푸코는 1954년에 첫번째 저서 『정신병과 인격』을 출간했다. 이렇게 심리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푸코의 공부는 깊어지고 있었지만, 푸코는 항상 프랑스의 억압된 사회ㆍ문화적 삶의 어떤 부분을 견디기 어려워했고, 그래서 프랑스를 탈출하고자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